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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보도연맹 학살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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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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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인 knp868grou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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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수정일 09.12.21 / 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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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연맹 학살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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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대상]
- 본문일부/목차
- ●보도연맹
●사건내용
●사건진상조사
3. 보도연맹원 학살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전쟁 도발하여 남침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버린 채 특급열차를 타고 피난을 가는길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을 가졌다. 그래서 (좌파인사들에 대한 사상 개조 단체였던) 보도연맹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주로 헌병대),경찰 또는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들이 수감되었던 교도소 교도관들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지않은 아직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에 있는 각 지역에 있는 보도연맹원 여러 명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한국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대량학살)범죄를 일으켰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명을 처형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학살 주체가 당시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같은 반공주의 성격의 극단적인 우파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우발적인 학살이 아닌 철저히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이승만정권의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곧 조선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파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와중에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 현재에도 추측만 할뿐,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인(헌병)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진행된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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