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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 대학 레포트 제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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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론] 율곡 이이(李珥)

1. 율곡의 생애와 저서 및 사상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 ~1584)는 조선이 낳은 위대한 철인이요, 경세가요, 또한 교육사상가이기도 하다. 필자는 그의 교육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몇 권의 저서와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율곡의 교육사상 전반을 포괄하는 내용이었다.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아명은 견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이다. 강평공 명신(康平公 明晨)의 5대손으로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아버지 이 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 재주가 높아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했으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했다.
율곡에게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충격을 준 것도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이었다. 그는 매일처럼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어느 날 봉은사에 들러 능엄경(稜嚴經) 등 불경에 접하게 됨으로써, 거기서 자신의 고뇌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3년상을 마친 19세 본, 즉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1년만에 돌아와 성리학에 몰두했다 하지만, 후일 그는 “마음은 유(儒)요 자취는 불(佛)이라”고 하여 선어(禪語)를 즐겨 읊고 불교의 현묘한 의미를 꿰뚫어 채득했다. 22세(명종 12) 때 노씨를 부인으로 맞고, 그 이듬해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안동 도산 서원을 방문했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원숙한 노학자였고, 율곡은 23세의 홍안의 선비였다. 거기서 이틀간 묵으며 서로 토론하는 동안에 퇴계는 율곡에게 “후배가 두렵다”는 옛 말을 새삼 느낀다고 격려했다.
1558년(명종 13)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이를 전후하여 과거 때마다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란 칭송을 받았다. 1564년(명종 19)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진출하여 명나라 서장관·청주목사·황해감사·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율곡과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은 경륜으로 서로 교감(交感)하며 서로 인품을 깊이 흠모하는 사이였다. 당쟁을 우려한 율곡이 대사간을 사직하려 할 때, 토정은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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